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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겸손의 빈 마음, 빈 손으로 오신 하느님, 아기 예수님의 크신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기쁜 성탄 밝은 새해 성공회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한인교회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7
신약성서에서 가장 낯설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서에 있는 한 구절입니다(11:16):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으십니다.” 성서 기자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신실하고, 자기 만족에 안주하기보다는 신앙으로 앞을 향해 나가는 일에 신실했을 때, 그들이 진정한 순례자로 살아갈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으로 알려지는 것을 즐거워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순례자들의 하느님으로, 즉 자신들의 삶이 완전하지 않기에, 여전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온전함을 향하는 여정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으로 선포하십니다. 올 10월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중동에 있는 피난민 캠프에 방문해 본다면, 말 그대로, 철저히 집없는 자(홈리스)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 어떤 삶의 방책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같은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결코 어떤 만족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며, 항상 어떤 미래를 바라 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수치감도 없이 함께 하시려는 이들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집없는 이들과 함께 집을 만들어 거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는 또한 다른 의미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를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께서 “수치”로 여기시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괴상한 표현입니까. 이는 그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동반자로 삼는데 절대 괘념치 않으시는 분임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함께 하는 어떤 사람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경험을 우리 대부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때문에 당황하고, 자녀들 때문에 부모님이 당황하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때로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다가 그 사람이 고함쳐 말하거나, 이상하게 행동하거나 하면,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으면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라는 동반자가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와 앞으로 움직여 나가려 할 때, 우리와 동행하는 것을 당황해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런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불완전하고 혼란스럽고, 게다가 죄많은 인간을 동반자로 삼는 걸 “수치”로 여기실 지 몰라.’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인정하고, 그들이 필요로하는 진리에 직면하려 할 때, 그 혼란스럽고 죄 많은 사람의 하느님이 되는 것을 행복해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 루가의 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토록 자주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시지 않음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자기 의심과 기쁨 없는 갈망에서 나오는 흐느낌을 들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러저리 헤매며 불안해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속에서 그런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의 순례 길에서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걷는 것을 즐거워 하시기에, 우리가 함께 걷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그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아주 쉽사리, 죄 많고, 의심 많고, 또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판단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걷는 일이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정말로 수치로 여기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면, 히브리서의 말씀이 강력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들은 이미 그 여정의 종점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미 완전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1고린 4:8에 나온 성 바울로의 분노어린 경멸의 말씀과 비교해 보십시오. -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걸 정말로 당황해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수치로 여기시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들은 하느님이 필요없는 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희망과 용서가 필요 없는 듯이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곤궁함을 아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성탄절에 그들과 함께 하시러 오십니다. 그들과 함께 살고, 죽고, 그들을 위하여 부활하시러 오십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물질적인 가난 뿐만 아니라, 자기 만족이라는 “부요함”이 없는 이들, 진정한 만족이 없는 이들, 자신들이 진정하고 온전한 인간성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을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러한 축복을 모든 형태의 가난한 이들, 바로 물질적인 재원이 없는 이들과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건네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배고픔과 필요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 봅시다. 함께 하면 수치스럽겠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런 다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하고 물어 봅시다.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곤궁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세상을 껴안고 계신다면,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성탄절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축복과 기쁨 주시기를 빕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Translated by the Rev’d Nak-Hyon Joo) 이 성탄절 메시지는 세계성공회사무소(런던)의 요청으로 주낙현 신부가 번역하여 세계성공회 웹페이지와 한국성공회 신문에 공식 게재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죄인을 풀어주시고, 사탄에 잡힌 사람들 구하여 주신다.” 이 말은 제가 가장 좋하는 대림절 성가의 한 구절입니다. 이 말은 또한 성탄절 이야기의 ‘부드러운’ 점들만 좋아하는 탓에, 우리가 종종 무시하고 지나가고 마는 성탄절의 한 면모를 되새겨 줍니다.
나자렛 예수께서 태어나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 인간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류사가 동튼 이래로, 사람들은 모두 덫에 걸려 살았습니다. 가장 훌륭하다는 이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회의를 품으며, 그분으로부터 멀어져서 서로를 두려워 하는 것을 대물림한 탓입니다. 인류사 이전에 하느님께 대한 대반항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피조물의 반항은 교만과 오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이 원초적인 비극의 신호로서, 지극히 뛰어난 자질을 가진 존재도 이러한 자기 오만으로 타락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천사들이 갖추었던 온갖 지능과 영적인 존엄도 루시퍼가 자기 존재의 기반인 하느님을 거절하는 극단적인 광기를 드러낼 때 이를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능과 존엄의 타락은 이 우주에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와는 동떨어진 세상을 살고 있음을 알고 느끼면서도, 이러한 덫에서 어떻게 헤어나올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의 탄생과 삶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이 탄생과 삶은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인류는 우리의 존엄성을 새로온 기반에 다시 세울 때라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신인 성자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기에, 모든 인간은 그 변화의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반항이라는 전염병은 이제 새로운 자비로운 ‘감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인간과 소통하시려는 하느님의 손길이 스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과 협력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다시 창조하시면서 우리에게 그 길을 이미 열어 놓고 계셨습니다. 내년은 영국 의회가 노예제를 철폐한지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이론적으로 확신하던 계몽적이고 진보적이었던 유럽 지식인들이 이루어낸 일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하느님 말씀의 성육신으로 손길이 스친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가를 열정적으로 깨달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낸 일입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가 노예였던 사람이 가진 존엄성에 대한 가혹한 모욕이며, 동시에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 영적인 건강과 고결에도 가혹한 상처를 내고, 노예 소유를 통해서 그 자신이 죄와 탐욕의 노예가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탄절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가 윌리엄 윌버포스와 그 밖의 노예제 철폐 운동가들을 기억하며 어떤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이기심이라는 감옥을 깨뜨려 열어줍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겪는 비참을 우리 삶의 뒷모습쯤으로 당연시하는 우리의 게으른 태도에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이제 우리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도록 합니다. “우리가 당연시하여 관심갖지 않는 비참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늘의 노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년에는 이러한 질문에 우리가 대답하는데 도움이 되는 많은 행사들이 있겠지만, 이미 우리는 몇가지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이 병사들, 성매매의 희생자들, 수십년동안 끊임없는 폭력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 그리고 이러한 폭력에 의해 집과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오시어 죄인을 풀어주신다.” 이제 그분이 ‘모든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일에 헌신하는 우리의 실천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합시다. 이제 예수의 그 존재와 그 말씀과 그 실천을 통하여 베들레헴으로부터 갈보리, 그리고 그 너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사건에 감사를 드립시다. “평화의 임금께 우리의 찬송을 드리니, 주님을 환영하라 선포하는 소리 울려 퍼지며, 하늘의 문들은 그 사랑하는 이름을 찬미하네.” 이 시간, 하느님의 은총과 행복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빕니다.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이 성탄절 메시지는 세계성공회사무소(런던)의 요청으로 주낙현 신부가 번역하여 세계성공회 웹페이지와 한국성공회 신문에 공식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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